대구(大丘)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를 말한다
조선 세종 때 신흥왕조의 기틀을 잡고 문풍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한 조선 초기의 문신. 자는 강중, 호는 사가정이며 세종 26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문종 1년에 집현전박사 등을 거쳐 세조 3년에 문신정시에 장원급제했다.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45년간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여섯 임금을 모셨으며 원만한 성품의 소유자로 단종 폐위와 사육신의 희생 등의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도 왕을 섬기고 자신의 직책을 지키는 것을 직분으로 삼아 조정을 떠나지 않았다. 당대의 비평가였던 김시습과도 미묘한 친분관계를 맺었다. 문장과 글씨에 능해 수많은 편찬사업에 참여했으며, 조선시대 관인문학이 절정을 이뤘던 목릉성세의 디딤돌을 이뤘다.
〈경국대전〉·〈동국통감〉·〈동국여지승람〉·〈동문선〉 편찬에 참여했으며, 왕명으로 〈향약집성방〉을 언해했다. 그의 저술서로는 〈역대연표 歷代年表〉, 객관적 비평태도와 주체적 비평안(批評眼)을 확립하여 후대의 시화(詩話)에 큰 영향을 끼친 〈동인시화〉, 간추린 역사·제도·풍속 등을 서술한 〈필원잡기 筆苑雜記〉, 설화·수필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한 〈태평한화골계전 太平閑話滑稽傳〉이 있으며, 관인의 부려호방(富麗豪放)한 시문이 다수 실린 〈사가집 四佳集〉 등이 있다.
덕(德)ㆍ공(功)ㆍ언(言)을 겸비했다고 평가되는 서거정. 조선시대에 서거정만큼 영화로운 삶을 산 지식인은 드물 것이다. 그는 네 번 현과(賢科)에 올라 여섯 왕을 섬겨 45년 간 조정에 있었으며, 23년간 대제학으로 있으면서 당대 문단을 주도했다. 실록의 그의 졸기에는 "대제학과 지성균관사를 겸임하였는데, 대개 문형(文衡)을 맡은 것으로서 전책(典冊)과 사명(詞命)이 모두 그 손에서 나왔다."고 하여,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문형임을 기술하였다. 서거정은 과거 시험을 23차례 주관하며 많은 인재를 뽑았고, 육조(六曹) 판서ㆍ사헌부 대사헌(大司憲)ㆍ한성부 판윤(判尹)ㆍ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 등 고위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서울대학교 奎章閣韓國學 硏究院" 발간
대구서씨 학문을 세우고 조선을 비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