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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서씨대종회

대구(大丘)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를 말한다

임오보 발문

대구서씨 임오보(창간보) 발문

壬午新鐫大丘徐氏世譜跋
임오년(1702년) 초간 대구서씨세보 발문
徐氏之譜 不傳於世 故不知所始而或云達城利川之徐 同出一源
서씨의 족보는 세상에 전래되지 아니한 까닭에 그 시원된 바를 알 수 없으나 혹 말하기를 大丘(達城)와 利川의 徐氏는 다 같이 한 연원에서 나왔다고 하니
夫權金 同祖新羅 鮮于韓 竝系箕子則一徐之同貫 理或然矣
대저 權氏와 金氏가 신라에 시조를 같이하고 鮮于氏와 韓氏가 기자에서 계통을 함께 하였다 한즉 徐氏로 관이 같다는 것이 이치에 혹시 그러할듯하나
文獻不足 無可考信 眉州之譜 不及蘇長史 又何害也
문헌이 부족하니 고증하여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眉州의 족보가 蘇長史에게 까지 정확하게 미치지 못하였으니 어찌 방해가 되겠는가?
嗚呼 同氣爲兄弟 兄弟之子 爲從再三從而服不免焉 服不免 則固遠矣
오호! 기맥이 같으면 형제이고 형제의 아들이 從·再·三從이 되나 喪에 服을 면치 아니하였다. 복을 면치 않아도 곧 멀어진다.
然自其禰而及其祖 以溯 其所自出則本乎同氣 今於吾 不無親疏 而自祖先視之則均是子孫也
그러나 그 아버지로부터 할아버지에 미쳐 그 난 바를 거슬러 올라가면 같은 기맥에 근본한 것이다. 이제 나에게는 친소가 없을 수 없지만은 祖先으로부터 볼 때는 다 한 자손이라
人無不愛其父母 以其愛父母之心 愛其父母之所以愛則雖易十世 亦何遠之有哉
사람은 그 부모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나니 그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모가 사랑하는 바를 사랑하면 비록 十世가 바뀌어도 또한 무엇이 멀겠는가!
蘇明允之言曰塗人也 吾以是惑焉 執塗之人而問焉則姓不知也 曾所昧也 宜乎喜不足以慶 憂不足以吊 遇其族而問焉則共此姓也 同吾祖也 戚然而感 欣然而悅 不知其所以然者 乃人之情 豈可與邂逅萍逢而曾所昧者 同年而語哉
蘇明允(蘇洵의)의 말에 길거리 사람과 같다하니 나는 이 말에 의혹하노라. 길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으면 姓도 모르고 일찍이 모르는 바라 宜例히 기뻐도 족히 경하할 것 없고 근심이 되어도 족히 吊問할 것이 없지마는 그 族人을 만나서 물으면 이에 姓도 같고 우리 조상을 같이 하는지라 슬픈 듯이 감동되고 기쁜 듯이 유쾌하여 그러한 까닭을 알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정이니 어찌 부평초처럼 우연히 만나서 일찍이 모르는 사람과 더불어 같다고 말한 것인가?
於是 收錄內外族以爲大丘徐氏譜 仍竊念我徐不顯於麗朝 入本朝 始大於四佳先生而中腹衰微 幾乎嗣絶
이에 내외족친을 수록하여 大丘徐氏족보를 만드노니 이제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우리 서씨는 고려조에서 크게 나타나지 아니하였고 조선조에 들어와 비로소 사가정선생께서 위대하였으나 중간에 다시 쇠미하여 거의 계통이 끊어질번 하였다.
至于忠肅公 亦晬而孤 及長 有四丈夫子 百餘年間 內外子孫繁盛 殆將千數而得姓 亦且二百有餘人 世襲冠冕 科第不絶
그런데 충숙공(諱 渻·號 藥峯)에 이르러 첫돌에 부친을 여의셨으나 자라서는 네 분의 아드님을 두시니 그 뒤로 백여 년간에 내외자손이 번성하여 거의 천명이나 되고 姓을 얻은이(分戶) 또한 이백 사람이 넘었고 계속하여 벼슬하고 과거에 급제함이 끊어지지 아니하였다.
蓋自 國朝以來 五居魁元 再典文衡 重陟黃閣 三人耆會
대개 조선건국이래로 다섯 번 장원하고 두 번 대제학을 지냈고 거듭 정승을 지냈고 세분이 기로회에 들어갔다
而時危世難 亦未有身蹈禍□ 貽累門閥 此實我祖先深仁厚德 種美毓祉 以啓我子孫無窮之休 吁其盛矣乎哉
玆以是 勉飭穉昧 仍以爲識
시대가 위태롭고 세상이 어지러웠건만 몸에 화(禍)를 받아 문벌에 累를 끼친이가 없었으니 이것은 실로 우리조상들이 어짊이 깊고 德이 두터우시며 아름다움을 심고 복을 모아서 우리 자손들의 무궁한 아름다움을 열어 주시니 아! 그 성대하도다.
이러한 것들을 어린이에게 힘써 가르쳐 주고자 이를 記錄하노라.
後孫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 文重謹識
후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文重은 근서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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