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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서씨대종회

대구(大丘)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를 말한다

을미보 범례

을미(乙未)(1775)중전(三刊) 大丘徐氏世譜凡例

범례 제18중 제1
徐氏本貫達城而達城 屬于大丘故今以輿地勝覺所載 大丘沿革達城形勝 冠于篇端云
서씨는 본관이 달성인데 달성은 대구에 속한 까닭에 이제 여지승람에 알려진바 대구연혁과 달성형승을 편 첫머리에 기재하노라
범례 제18중 제3
徐氏凡有七貫 利川之譜 起於新羅阿干徐神逸 長城之譜 起於徐稜 扶餘之譜 起於徐秀孫 連山之譜 起於徐寶 南平之譜 起於徐麟 平當之譜 起於徐 俊邦 竝大丘爲七而世稱徐之貫 不同 皆以徐神逸爲祖
서씨는 모두 七貫이 있는바, 利川의 보첩은 신라 아간 徐神逸에서 기원하고, 長城의 보첩은 徐稜에서 기원하였으며, 扶餘의 보첩은 徐秀孫에서 기원하고, 連山의 보첩은 徐寶에서 기원하였으며, 南平의 보첩은 徐鱗에서 기원하고, 平當의 보첩은 徐俊邦에서 기원하였나니 大丘와 아울러 七貫이 되므로 세상에서는 徐氏의 貫이 같이 않으나 서신일로서 始祖를 삼는다고 일컫는다.
義城金氏譜亦云徐之先 出自箕子 新羅末有徐神逸 高麗初有徐穆 利川之徐皆其後 大丘峯城 分自利川 同是神逸之後也
義城金氏의 보첩에서도 또한 “徐氏의 선조는 箕子로부터 나와 新羅末에 서신일이 있고 高麗初에는 서목(徐穆)이 있으니 利川의 徐氏는 모두 그 後孫이나 大丘 峯城도 이천으로부터 나뉘었는바 한가지로 신일의 후손이다.”라고 하였으나
世代旣遠 文獻無徵 未可以得於傳聞者 據以爲安 故 竝皆略之
世代가 이미 멀고 文獻도 남아있는 것이 없어 전해들은 것을 근거로 하여 安心한는 것도 옳지 못한 까닭에 모두 아울러 약기(略記)하였다.
維大丘之徐一爲版圖公派 姓同貫也 居同府也 其出於 一源無可疑者 然版圖公派 旣自有譜 今以壬子譜所載舊本無所增損 載之壬篇以見其槩云
유독(惟獨) 大丘徐氏의 하나는 版圖公派가 되고 하나는 少尹公派가 되었어도 성(姓)과 관(貫)이 같고 거주(居住)가 동부(同府)이니 한 근원(根源)에서 나온 것을 의심(疑心)할 바 없는 것이다. 그러나 版圖公派는 이미 족보가 있으니 이제 壬午譜에 재록(載錄)된 구본(舊本)에서 증손(增損)함이 없이 임편(壬篇)에 실어 그 대개(大槪)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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