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大丘)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를 말한다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 문신. 자는 시백(施伯), 호는 만사(晩沙)이다. 본관은 대구(大丘), 중추부(中樞府) 판사(判事)서성(徐渻)의 장남이시고, 어머니 여산송씨(礪山宋氏)는 목사(牧使) 송녕(宋寧)의 딸이시다. 1601년(선조3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1603년(선조36)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正字)에 보임되시었다.
1605년(선조38) 승정원 주서(注書)에 임명된 이듬해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여, 사헌부 감찰(監察)로 옮겼고, 공조,병조의 좌랑을 역임,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명나라 북경에 다녀오셨다. 1607년(선조40) 성균관 직강(直講)에 임명되었다가 형조 정랑으로 옮겼고, 1608년(선조41) 예조 정랑에 임명되시었다.
1608년 광해군때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시었고, 1609년(광해군1)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옮긴후때 『선조실록(宣祖實錄)』을 편찬,기주관(記註官)으로 실록을 편찬 하시였다.1611년(광해군3) 사헌부 헌납(獻納)에 임명되시어, 암행어사로 활동, 1612년(광해군4)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정주목사(定州牧使)로 피명되었다.
1626년(인조4) 대사간(大司諫)에 임명, 1636년(인조14)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된후, 경기도관찰사로 나가셨다.1643년(인조21) 형조 판서에 임명되시고, 기영회(耆英會: 기로소)에 들어갔다. 그해 겨울에 성절사(聖節使)에 임명되어 심양(瀋陽)에 갔다가 돌아오셔서, 1644년(인조22) 의정부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시었다.
1645년(인조23) 신상의 어려움으로 사임을 간청하여, 인조는 막중한 우의정의 기무(機務)직에서 중추부 판사로 피명,관직을 마감하였다.1645년 2월 29일 별세, 향년 73세 이셨다.
묘소는 경기도 영평(永平) 서쪽 금화봉(金華蜂)의 묘원(墓園)에 있는데, 그의 양손(養孫) 서문중(徐文重)이 지은 묘지(墓誌)가 남아있다.
초배(初配) 창녕성씨는 사과(司果) 성희순(成希舜)의 따님으로 無育이시다.
계배(繼配)는 창녕성씨로 중추부 지사 성염(成恬)의 따님인데 觀察使 원리(元履)를 낳으셨다. 원리(元履)는 후손이 없어 종제(從弟) 서정리(徐貞履)의 아들 서문중(徐文重)을 양자로 삼으셨다. 문중(文重)은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을 역임 하셨다.
삼배(三配) 청주한씨(淸州韓氏)는 백령진수군첨절제사(白翎鎭水軍僉節制使) 경(慶)의 따님으로 유리(裕履)를 낳으셨다. 유리(裕履)는 문영(文永), 문규(文奎) 낳으셨는데 문영은 尤庵先生에게 종학(從學)하여 통훈대부로 경양찰방(景陽察訪)을 역임하셨다.